CULTURE

벼랑 끝에는 배려가 없다…여린 사람들의 죽음

당신은 몇 명의 심리를 이해했는가? 등장인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가? 연극 <햇빛샤워>는 13명의 배우가 무대에 선다. 그들 각각이 짜인 각본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다 최종에 11명만 남는다. 다른 이들을 뒤로하고 두 명의 배우는 어디로 갔는가? 누가 그들의 생사를 다른 이들과 구분했는가? 많은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극 <햇빛샤워>는 관객에게 심리적 동질감을 요구한다. 당신이 얼마나 세상을 뚜렷이 살았는지, 얼마나 다양한 이를 만났는지, 연극 말미에 가늠케 한다. 두 주인공의 죽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답이 없는 죽음, 자살

두 주인공은 연극에서 죽음을 맞는다. 한 명은 자살, 또 다른 한명은 다른 이를 해하고 숨을 거둔다. 연탄 가게 양자로 들어와 어려운 이웃을 돕던 동교가 자살을 택한다. 지하 단칸방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광자, 그녀가 세상 물정 모르는 청년의 죽음에 괴로워한다. 빚을 지고 직장에서 승진하기 위해 사람들과 관계를 맺던 광자가 흔들린 건 동교의 죽음이 이유다. 그 둘은 생전에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가 얽힌다. 생전에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았지만, 종국에 그 둘은 죽음으로 얽힌다. 여자 주인공을 짝사랑했던 소년 동교, 동교를 무관심하게 대했던 그녀가 생사의 경계를 넘는다. 불륜 남자 친구로 나오는 광자의 직장 상사, 그가 윽박지르는 대사(‘선을 넘지 말라’)를 뒤로 하고 그녀는 선을 넘는다.

여기서 광자의 행동을 좌우한 건 동교의 죽음이다. 자살의 이유를 알고 싶던 광자가 택한 죽음은 그간 그녀가 품었던 의문의 끝이다. 세상은 광자에게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왜 동교가 죽어야 했는지, 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죽음을 택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이유를 짐작해야 하는 건 관객의 몫이다.

명확하게 이유를 대지 않는 죽음. 여기서 심리의 이해 정도가 가늠된다. 관객이 등장인물을 얼마큼 이해했는지 드러난다. 물론,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들의 죽음과 연관된 나머지 11명의 배우가 시신 앞에서 주춤하듯 당신도 주춤할 수 있다. 그간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주변인을 어떻게 대했는지 관객의 속내가 여기서 드러난다. 당신은 책임감을 느낄지도, 혹은 분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의 이유를 끝내 짐작하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만큼 등장인물의 삶과 태도가 특별하지 않다. 달리 말하면 극중 인물이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게 접하는 인간 군상이다. 두 주인공의 죽음도 마찬가지. 그런 류의 죽음이 너무나 흔하다. 어제도 벌어졌고, 오늘도 일어났으며, 내일도 예정됐다. 누군가 삶의 태도,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그러한 죽음은 앞으로도 일어난다.

여린 사람들의 죽음

우리 사회에서 흔히 “여리다”라고 표현되는 사람의 죽음은 끊이지 않는다. 가해자를 찾기 어려운 죽음, 심리 부검을 해도 범인을 알지 못할 죽음이 계속된다.

주변 등장인물은 뚜렷하게 두 주인공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았다. 조금씩 지치게 해서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죽음의 사유는 온전히 그들에게 있지 않다. 광자와 동교 주변에서 그들과 관계를 맺던 사람 모두가 죽음에 조금씩 책임이 있다. 그래서 다른 배역들이 주춤한다.

어찌 보면 여렸던 광자, 그녀보다 더 여렸던 동교, 이들의 죽음은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당연하다. 소위 ‘약자’, ‘루저’로 표현되는 사람의 죽음은 흔하다. 그들은 빈번하게 어린 나이,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사회 밑바닥에서 생활했던 광자와 동교.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건, 명성이 높은 이도 아니고 힘을 지닌 권력자도 아니었으며 돈을 많이 가진 재력가도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치였고 그들에게 상처받았다. 강하게 대처했던 광자가 동교에게 정을 품은 건 광자 역시 여렸다는 방증이다. 강하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려던 그녀가 연민과 동정으로 동교를 바라본 건 그간 품었던 의문을 풀고자 함이다. 왜 주변 사람들과 이렇게 얽혀야 하는지, 그들에게 휘둘려야 하는지, 광자는 해답을 알지 못하고 죽는다.

죽음을 마주 선 이들이 움푹 파인 광자의 방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늪과 같은 그곳에 더 이상 상관하지 말자, 이제는 나와 관계없는, 그간의 관계마저 부정해야 하는 사람이 되자, 죽음의 책임은 나에게 있지 않다, 이렇게 애써 부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야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다시 삶을 살아가고, 같은 방식으로 다른 이를 대할 수 있어서다. 주변인이 조금씩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여린 사람들의 죽음은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다. 광자와 동교 같은 이들이 계속해서 사라진다는 얘기다.

조호성 기자

시놉시스
동교네 집 반지하에 세 들어 살고 있는 20대 후반의 광자. 그녀는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지만 전과가 있어 쉽지 않다. 연탄집의 양자인 20살의 청년 동교.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달동네에 연탄을 무료로 나눠준다. 어쩌면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광자는 그런 동교를 보고 무시한다. 그런 걸로 가난과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그런 동교가 어느 날 죽어버린다. 광자는 가슴이 무너진다. 이제 이름을 바꿨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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