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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와 초를 등에 진 장사 중동의 나라 이란 촛대
구하기 어려운 고래기름
예로부터 고래 기름은 양초의 재료로 쓰였다. 지금도 금지된 포경은 희귀한 재료를 얻으려는 목적에서 암암리에 행해졌다. 대표적으로 고래 기름은 윤활유와 양초, 그리고 비누의 원료가 된다. 바다에서 살아가는, 가장 덩치 큰 포유류는 그렇게 사냥감이 됐다. 촛대보다 발달된 램프도 그 불빛을 만드는 데 고래 기름을 사용한다. 보존기간이 길고 태우는 데 있어 냄새도 없던 고래기름은 고가에 거래됐다.
사치재, 귀족의 전유물
어둠은 동서양을 불문한다. 당연 빛을 내는 물건은 고가에 거래됐다. 빛을 머금은 야광주, 고래로 만든 양초는 귀하기 귀한 물품. 중동의 원유가 지금처럼 대량 생산되기 이전 어둠은 문명의 발전을 더디게 하는 제약이었다.
특이한 형태, 촛대의 다양성
귀한 불빛을 내는 데 사용되는 양초, 이를 꽂아 두는 받침 역시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나비와 화촉, 혹은 상상의 동물을 조각해서 멋을 더했다. 받침에서 보이는 사람이 등에 짐승을 지고 그 위로는 초를 태웠다.
나무 재질
나무는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조각재료로 가장 많이 쓰인다. 불과 상극의 성질을 지닌 나무, 하지만 양초 받침으로 유물의 제작자는 나무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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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빛 제작연대는 일제 강점기
촛대, 어둠을 밝히다
전기가 발견되기 이전, 밤은 인간에게 활동의 제약을 가했다. 위험이 커지는 시간, 짐승 또는 범죄를 막으려 기름을 구하고 촛대를 찾았다.
통행 금지
흔히 80년대에만 야간통행을 금지했다고 생각하지만, 고대에도 밤중에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제도가 존재했다. 야경꾼은 종을 치며 시간을 알렸고 마을 어귀에는 어김없이 고요함이 찾아 들었다.
방안을 밝히다
심지에 불을 지피고 방안에서는 여인들이 수를 놓거나 바느질에 매달렸다.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는 겨울, 초의 중요성은 커졌고 집집마다 귀한 양초를 구하려 애를 써야 했다.
거북모양 받침
예로부터 장수를 상징했던 거북은 장생도와 같은 서화에 단골 소재로 등장했다. 특이하게도 촛대 하단부에는 거북 모양의 받침이 보인다. 발과 꼬리까지 조각하지 않았으나 등껍질과 머리 부분에서 거북의 형상이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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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香) 예로부터 주변의 나쁜 기운과 냄새를 없애려 나무에서 나오는 진액, 또는 나무 자체로 향을 만들어 사용했다.
종교의식과 향
분향, 즉 향을 피우는 행위에는 공경과 기도의 의식이 결합된다. 일반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뿐 아니라, 불교와 가톨릭 등 종교에서도 분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의식은 향을 피우는 행위로 시작된다.
뇌 감각과 직결된 향
사람의 후각은 뇌와 직결되는데 피로도가 다른 감각보다 높다. 즉, 쉽게 둔화되어 다른 종류의 냄새가 아니라면 분간하기 어렵다. 향은 경건함을 높이는 동시에 집중력을 살리고 편안함 감정도 불러온다.
기호품이자 필수품
과거 선조는 향을 태우는 행위를 선호했다. 선비의 풍류와 맞닿아 종교의식과 같은 특이한 때 이외에도 시를 짓거나 잠을 청할 때 향을 피웠다. 특히 외부에서 객이 오거나 여러 사람이 모일 일이 생길 경우 향은 필수품이었다.
향 피우고 손님맞이
집이나 사당, 건축물 바닥에 고정된 형태로 피우는 향로와 달리 둥근 형태의 향로도 발견된다. 새와 꽃 등의 장식을 겉면에 새겨 멋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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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鳳凰) 창덕궁 대조전에 있던 벽화로 상서롭고 길조로 여겨지는 봉황을 그렸다. 덕이 있는 임금이 출현나고 태평성대가 이뤄질 때 봉황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전해진다.
상상의 신수
용과 기린, 거대한 거북 형상을 띤 영귀(靈龜)와 함께 사령(四靈)으로 분류된다. 봉과 황은 각각 암수를 구분하는 의미로 절개와 존엄 등을 상징한다. 청렴한 존재로 천길 하늘을 나는 봉황은 임금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동나무와 대나무
봉황도에서는 봉황 이외에도 오동나무와 대나무, 모란꽃 등이 발견된다.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봉황, 그 전설의 내용대로 화폭에는 주변환경까지 그렸다. 대나무는 빠르게 자라지만 꽃과 열매를 맺기까지 수십년이 걸린다. 60년에서 100년 넘는 시간 동안 한번 열매를 맺는다고 알려졌다.
산해경의 시각화
중국 고서 산해경(山海經)에서 언급한 봉황을 그림으로 그렸다는 봉황도, 산해경은 각종 신화와 고대 지리에 관한 기록이 서술됐다. 모두 18권으로 제목과 같이 산과 바다에서 발견된 풍물이 이야기로 전해진다. 환상과 상상의 산물로 여겨지는 일들과 실제 지명 및 나라 이름이 동시에 수록된 중국 고전이다.
모란과 바위, 그리고 폭포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과 장수를 기원하는 바위, 그리고 풍류가 엿보이는 폭포에서 그림의 존귀함이 드러난다. 화폭에서 보이는 태양 역시 임금의 덕치를 상징한다. 각각의 봉황은 날기도 하고 때로는 내려앉아 쉬기도 하면서 우아함을 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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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엣(Viet)족 향로 베트남 향로, 비엣족은 다른 명칭으로 킨족(京族)이라 불리기도 한다. 베트남은 54개에 달하는 다민족 국가. 비엣족은 최대 다수족이며 이외에 따이족, 므엉족, 크메르족 등이 존재한다.
용문양 음각과 4개의 다리
중앙 부위에는 용의 형태를 음각으로 새겼다. 하단 받침대 위로 네 개의 다리가 있고 상단 부위를 지탱한다. 아시아 국가답게 신성시하는 동물 '용'으로 향로를 장식했다.
환상 신수(神獸)
향로 꼭대기에는 머리에 뿔이 달린 사자상을 올렸다. 환상의 동물은 여러 맹수의 장점을 합친 모습으로 네 개의 발과 긴 꼬리를 지녔다.
향로에 열린 열매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연안에 서식하는 빈랑나무 열매를 향로 양쪽에 달았다. 빈랑에는 강한 각성효과가 있어 나무가 자라는 곳의 주민들은 식사 후에 그 열매를 씹는다. 커피와 같은 기호품인데 현대에는 발암물질로 분류되어 각종 규제를 받는다.
황동 재질
조상을 모시는 사당에 향을 피우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향로는 황동으로 제작됐다. 구리와 아연의 합금 '황동'은 흔히 놋쇠라 불리며 예로부터 공예품과 악기를 만드는 데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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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귀면문로 | 문화재청 귀면은 큰 눈과 강조된 코, 날카로운 송곳니 등을 가진 괴수의 얼굴을 뜻한다. 공격적인 모습과 위엄이 서린 형상으로 고분과 건축물, 의례도구 등에서 발견된다.
수면(獸面) 조각한 다리
하단 부분에는 세 개의 다리를 만들어 받침대의 역할을 대신한다. 각각의 다리에는 짐승의 얼굴을 조각함으로써 공포와 위엄을 살렸다. 귀, 코, 큰 이빨까지 세밀하게 표현했다. 전면부와 같은 동물의 형상을 띠고 있다.
환상 동물, 도철
귀면과 유사한 문양은 중국 은나라 시대의 청동기 유물에서도 발견된다. 도철문으로도 불리는 괴수 형상은 도철(饕餮)이라는 신화적 동물의 상상이다. 도철은 흉수로 분류되며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변방으로 쫓겨났다. 도철을 포함한 4대 흉수는 궁기(窮奇), 도올(檮杌), 혼돈(混沌)이다.
2% 부족한 귀면로
익살스러운 귀면의 외형은 보존상태가 좋고 문양 역시 세밀하다. 양쪽 송곳니를 두고 가지런한 이빨이 보이고 입을 벌린 상태를 표현함으로써 혀까지도 조각했다. 완벽하리만큼 좌우 대칭 구도가 좋고 짐승의 눈썹과 귀까지도 뚜렷하게 확인된다. 다만, 양쪽 고리가 있어 무거운 귀면로를 들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손잡이 부분은 없다. 안쪽에 불받침대 또한 사라졌다.
청동, 시간의 흔적에 색이 있다면 푸른색
구리와 주석의 합금 청동은 예로부터 무기, 조각 등의 재료로 사용됐다. 청동기시대를 거치는 동안 인류는 칼, 기계부속 등을 청동으로 만들며 문명을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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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에서 강림하는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과 함께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아미타불 표현
위엄과 자비
금니(金泥)로 그려진 아미타삼존 주위에는 비파, 장고, 소라로 만든 법라(法螺) 등 악기가 그려짐. 보살 주변에 그려진 곡선의 아름다움이 청각의 시각화와 함께 극락정토(極樂淨土)의 공감각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존귀한 재료
금가루와 아교를 섞어 서화의 안료로 사용. 진흙 니(泥)를 사용해 '니금'으로 불리는 기법. 대개 검은 바탕에 보색이 되는 금분을 사용함으로써 귀한 경전과 서화에 활용
극락정토
부처의 자비로운 세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향. 중생이 살아가는 속세 '사바'와 달리 성불해서 이를 수 있는 세계이다. 천국, 유토피아와 같이 아미타불의 가르침에 귀의하면 내세에 극락왕생한다는 믿음이 실현되는 곳.
아미타불
극락정토에 머문다는 부처로 그 존재를 높여 무량광불(無量光佛) 혹은 무량수불(無量壽佛)로도 불린다. 불교에 귀의한 법장보살이 서원을 세우고 오랜 수행 끝에 아미타불 부처가 됨. 이후 극락세계를 다스리며 이곳에서 설법을 한다고 전해진다.
헤아리기 어려운 광명과 수명을 지녔다는 의미의 아미타불은 완전한 지혜와 자비를 상징한다. 극락정토에는 질병에 따른 고통, 불구에 따른 불행이 없고 배고픔과 번뇌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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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 조선시대 정조 6년
기상 제도
조선 시대 측우기와 측우대는 농사를 천하의 큰 근본으로 삼았던 당시, 기상(氣像)을 기록하고 다음 해 농사일에 준비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도구. 고을 수령이 직접 우량(雨量)을 왕실에 보고토록 한 제도 존재
측우대 위치
지금의 청덕궁과 창경궁 일대를 그린 궁궐그림 '동궐도(국보 제249호, 19세기 전반)'에서 이문원((摛文院) 앞에 놓였던 게 확인. 이문원은 왕실 문헌을 보관한 전각으로, 규장각의 부속 시설.
정조 임금의 기우제
조선시대 애민사상이 드러나는 기록으로 당시 농업의 중요성도 보여준다. 지금의 자본주의와 달리 농본주의가 나라의 기틀이 됐던 시대, 치우와 치수의 기술이 부족했던 임금은 주술적 의식에라도 기대고 싶었다.
측우대 명문
성상(聖上, 정조) 6년(1782) 여름에 경기 지역에 큰 가뭄이 있어 기우제를 여러 번 지냈으나 효험이 없었다. 이때 우리 성상께서 스스로를 탓하고 신하들의 뜻을 물었으며, 직접 우사단(雩祀壇)에서 기도할 때 양산도 물리치셨다. 곤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밤새도록 밖에 머무셨고, 제사를 마친 후에는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셨다. 돌아오는 길에 가마를 멈추고 사형수 이하의 죄가 가벼운 사람을 석방하셨다. 이날 도성의 백성들이 모두 바라보며 감격하였고,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면서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 이처럼 걱정하고 부지런히 하시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지 않겠는가. 비록 비가 내리지 않아도 백성들의 기쁨은 비가 내린 것과 같다.'고 하였다.
해가 지기 전에 과연 큰비가 내려 밤에는 1촌 2분이 되었으니 이는 실로 우리 성상의 지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다. 성상께서는 그래도 그 미흡함을 걱정하시고 내각에 명령하여 이문원 뜰에 측우기를 만들어 설치하고 우량을 살피게 하셨다. 비가 흡족히 내리자 신(臣) 심념조에게 명(銘)을 짓고 신 정지검에게 쓰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신들은 근신(近臣)이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반드시 우리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 걱정하심을 먼저 알고 그 걱정을 함께하지 않을 수 없다. 비가 내리면 우리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 기뻐하심을 먼저 알고 그 기쁨을 함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측우기에는 임금과 백성의 걱정과 기쁨이 연결되어 있으니 신들이 감히 공경히 지키고 부지런히 살피지 않겠는가. 이에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여 명을 짓는다.
이 측우기의 분과 촌을 살펴 저 멀리 떨어진 곳의 사정을 헤아리네. 비가 적으면 가물까 염려되고 많아도 홍수가 날까 상심하네. 이후로 만년 동안 오직 적당하기만을 기도하네.
직제학 신(臣) 심념조가 명령을 받들어 짓고, 직제학 신 정지검이 명령을 받들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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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056호 조선시대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1~2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중요시하는 경전(經典)
대승불교란 소승불교과 달리 여러 사람의 해탈, 구도를 목적으로 한다. 속세에서 중생에게 큰 가르침을 설파하고 깨달음의 세계로 보살을 이끈다. 이타적인 마음가짐으로 혼자만의 해탈이 아닌, 일체중생의 구제에 힘을 쏟는다.
'대불정수능엄경' 또는 '능엄경'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승려 신총(信聰)에게 대자(大字; 큰 글씨)로 판하본(板下本)을 쓰게 한 뒤 1401년(태종 1년)에 판각하여 간행
발간 시기 추정
15세기 말까지 사용된 반치음(ᅀ)과 옛이응(ᅌ) 등의 묵서 기록 발견
보존 가치
동일 판본인 보물 제759호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의 일부 빠진 장수(張數)를 보완하고 본문 왼쪽에 일(一), 이(二) 등 해석을 돕기 위한 석독구결(釋讀口訣)의 사례 등이 확인, 조선 초기 불경 간행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고 중세 국어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판단
자연과 도심의 조화로 대표되는 신도(新都) 세종, 그 매력이 푸릇푸릇 녹색이라면 옛 정취가 묻어나는 서울, 고도(古都)의 색은 가을빛입니다. 왕조(王朝)의 기억이 담긴 고궁, 생각이 복잡할 때 이보다 좋은 산책로가 없습니다. 선조들이 걸었던 길과 그 길을 따라 펼쳐지는 광경은 수백 년 세월이 흘렀어도 변할 줄 모릅니다. MEDIA N 과 함께 고도의 기억을 공유해 보시죠. Created by MEDIA N | IMGⓒ :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 National Museum of Korea |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Take a walk
A great city is a great desert?
옛 조상들은 임금과 신하를 물과 물고기에 비유했죠. 어진 임금과 현명한 신하가 만나면 백성이 편안하다는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해서 고궁에는 연못을 조성하고 물고기 조각상을 배치하기도 했죠. 어수당(魚水堂)과 부용지(芙蓉地) 등이 대표적인 장소입니다. 모두 창덕궁 후원에 있으며 어수당은 현재 그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부용지는 여전합니다. 우주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 외국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늘과 땅은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꾸며졌다는 부용지(芙蓉地). 그곳에는 땅을 형상화한 연못과 하늘을 닮은 둥근 섬이 있습니다. 부용은 불가에서 중시하는 연꽃을 의미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광경으로 꼽히는 장소이기도 한데, 특히 가을 단풍이 지면 그 모습이 풍류와 운치를 아는 이들의 눈길을 끌죠.
창덕궁 후원에는 연경당(演慶堂)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려 120칸이나 되는 가옥이죠. 오랜 옛날 지금의 건폐율, 혹은 연면적처럼 양반들의 가옥 크기는 99칸으로 제한했습니다. 임금만이 100칸 이상의 가옥에서 살 수 있었죠. 칸이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정확한 넓이의 도량형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령 건축물의 가로에 기둥이 5개라면 4칸이 되고 세로에 3개라면 2칸이 됩니다. 결국 4와 2의 곱으로 해당 건물은 8칸이라 합니다. 여분 없이 99칸 딱 맞추어 집을 지었다면 조금은 불경스러운 양반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찌됐건, 연경당은 22세로 절명한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었습니다. 임금이 승하하면 생전의 업적을 치하하려는 목적으로 칭호를 정하는 추봉(追封)을 했습니다. 효명세자는 명칭에서부터 알 수 있듯 생전에 왕으로 오르지 못하고 세자 시절 순조를 대신해 왕권을 펼치다 4년 만에 병사했습니다. 그 뒤로 조선왕조는 연이어 후사가 없는 바람에 왕위 계승 순서가 왕족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결국 아들 헌종 이후로 먼 친척이 되는 철종이 왕위를 계승하고 다시금 먼 친척에 해당하는 고종에게까지 왕권이 이르게 되었죠.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후 직계로만 왕권이 넘어간 게 아니지만 조선 후기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희정당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다양하게 사용됐습니다. 때로는 침실, 때로는 집무실, 외국 사신을 맞는 장소로도 이용했죠. 보수하는 과정에서 서양식 건축 방법이 적용되며 다른 건축물과 상이한 모습을 보입니다. 내부 장식물 역시 구한말 외국 문물이 국내에 유입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게 합니다. 2인 이상이 앉을 수 있는 의자부터 내부에 놓인 가구는 서양식입니다.
왕궁은 외전과 내전, 편전, 침전 등으로 나뉘는데 외전은 말 그대로 공식적인 대외 행사가 이뤄집니다. 내전은 왕실 가족 구성원의 생활 구역이죠. 편전은 집무실의 역할을 합니다. 침전은 일반인들의 침실에 해당하죠. 희정당은 창덕궁의 내전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편전으로 사용됩니다.
창덕궁에 들려면 돈화문(敦化門, 보물 제383호)을 지나야 합니다. 긴 칼을 옆에 찬 수문장과 왕궁의 위엄을 상징하는 거대한 문이 산책의 첫걸음이죠. 유교의 나라답게 돈화란 명칭으로 공자의 덕을 기립니다. 1412년에 지어졌다 하니 반세기 역사를 지켜본 문화재로 손색이 없죠. 아시다시피, 옛 나라는 왕도(王道)와 어문(御門)을 구분했습니다. 임금과 고관대작만 이용했다는 문이 우리 앞에 열려 있습니다.
돈화문 2층에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있습니다. 옛 선조는 하루를 24시간이 아닌, 100각으로 나눴습니다. 전기가 없던 시절, 낮을 만드는 태양의 존재는 귀하다 못해 숭배의 대상이 됐죠. 그러기에 일출과 일몰 시각이 우리의 일과를 조절했습니다. 여기서 선조들은 일출과 일몰 전후를 5각으로 잡고 그 사이의 밤 시간을 5등분한 뒤 1경, 2경, 3경, 4경, 5경으로 정했습니다. 1경은 다시금 5등분으로 나눠 각각을 점이라 했습니다. 이런 시간제를 경점법(更點法)이라 합니다. 돈화문은 정오(正午)와 인정(人定, 1경 3점), 파루(罷漏, 5경 3점)에 북과 종으로 시간을 알렸습니다. 즉, 해가 지고 나서 통행금지와 해제를 알리는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기록에는 인정에 종을 28번 쳤고 파루에는 종을 33번 울렸다고 전해집니다.
궁궐에서는 때로 성대한 잔치가 열렸습니다. 임금 혹은 선왕, 대왕대비 등이 천수를 누릴 때 그 기념을 했습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의학과 보건, 위생 지식이 부족했기에 백성은 여러 질병에 시달려야 했죠. 임금과 귀족 계층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긴 수명을 누렸으나 권력 다툼과 독살, 원인이 불분명한 질병으로 단명한 이들도 있습니다. 단종, 연산군, 소현세자, 사도세자, 효장세자, 효명세자 등이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궁궐에서 열린 연회, MEDIA N 과 함께 당시 장면을 살펴 보시죠!!
기축년 궁중잔치
순조어극 30년
진찬도
1829년(순조 29) 2월에 거행된 궁중연회. 순조의 등극 30년을 기념하는 진찬도입니다. 연회에 참여한 대왕대비와 왕대비, 문을 지키는 병졸, 악공, 왕세자의 소차(小次)와 정문으로 가는 길, 상을 나르고 술잔을 올리는 차비(差備) 등 궁중 연회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궁중 행사도
조선시대 궁중 잔치 그림의 일부입니다. 현재까지 어떤 행사를 기록한 것인지 확인되지 않습니다. 단이 설치됐고 그 위에 녹색 단령을 착용한 사람들이 좌우측으로 앉아 있습니다. 머리에 꽃을 꽂았으며 앞에 놓인 상에도 꽃이 있습니다. 악사들은 단 위, 아래에는 처용무 복장의 무용수들이 있죠. 단 아래 좌우에는 무관들과 의장물을 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담장 근처에는 가마와 백마를 몰고 가는 이들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