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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
조선시대 정조 6년
기상 제도
조선 시대 측우기와 측우대는 농사를 천하의 큰 근본으로 삼았던 당시, 기상(氣像)을 기록하고 다음 해 농사일에 준비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도구. 고을 수령이 직접 우량(雨量)을 왕실에 보고토록 한 제도 존재
측우대 위치
지금의 청덕궁과 창경궁 일대를 그린 궁궐그림 '동궐도(국보 제249호, 19세기 전반)'에서 이문원((摛文院) 앞에 놓였던 게 확인. 이문원은 왕실 문헌을 보관한 전각으로, 규장각의 부속 시설.
정조 임금의 기우제
조선시대 애민사상이 드러나는 기록으로 당시 농업의 중요성도 보여준다. 지금의 자본주의와 달리 농본주의가 나라의 기틀이 됐던 시대, 치우와 치수의 기술이 부족했던 임금은 주술적 의식에라도 기대고 싶었다.
측우대 명문
성상(聖上, 정조) 6년(1782) 여름에 경기 지역에 큰 가뭄이 있어 기우제를 여러 번 지냈으나 효험이 없었다. 이때 우리 성상께서 스스로를 탓하고 신하들의 뜻을 물었으며, 직접 우사단(雩祀壇)에서 기도할 때 양산도 물리치셨다. 곤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밤새도록 밖에 머무셨고, 제사를 마친 후에는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셨다. 돌아오는 길에 가마를 멈추고 사형수 이하의 죄가 가벼운 사람을 석방하셨다. 이날 도성의 백성들이 모두 바라보며 감격하였고,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면서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 이처럼 걱정하고 부지런히 하시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지 않겠는가. 비록 비가 내리지 않아도 백성들의 기쁨은 비가 내린 것과 같다.'고 하였다.
해가 지기 전에 과연 큰비가 내려 밤에는 1촌 2분이 되었으니 이는 실로 우리 성상의 지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다. 성상께서는 그래도 그 미흡함을 걱정하시고 내각에 명령하여 이문원 뜰에 측우기를 만들어 설치하고 우량을 살피게 하셨다. 비가 흡족히 내리자 신(臣) 심념조에게 명(銘)을 짓고 신 정지검에게 쓰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신들은 근신(近臣)이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반드시 우리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 걱정하심을 먼저 알고 그 걱정을 함께하지 않을 수 없다. 비가 내리면 우리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 기뻐하심을 먼저 알고 그 기쁨을 함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측우기에는 임금과 백성의 걱정과 기쁨이 연결되어 있으니 신들이 감히 공경히 지키고 부지런히 살피지 않겠는가. 이에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여 명을 짓는다.
이 측우기의 분과 촌을 살펴 저 멀리 떨어진 곳의 사정을 헤아리네.
비가 적으면 가물까 염려되고 많아도 홍수가 날까 상심하네.
이후로 만년 동안 오직 적당하기만을 기도하네.
직제학 신(臣) 심념조가 명령을 받들어 짓고, 직제학 신 정지검이 명령을 받들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