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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개
국립민속박물관 | CREATED BY MEDIA N 2023. 4.30.

살랑살랑 노리개

예로부터 여인들이 장신구로 허리춤에 차던 노래개. 그 모양과 색은 다채롭고 아름다워 전통의 미를 대표한다. 귀걸이나 목걸이 문화가 덜 발달한 조선시대 노리개는 그 특성을 더한다. 가락지와 노리개, 어찌보면 요즘 여인들의 명품백과 비견될 필수템.

실용성과 심미성

단순히 멋으로 노리개를 달고 다니지는 않았다. 노리개에는 여러 부속물이 달려 실용성을 더하고 있다. 사향을 담은 노리개는 향을 품어 지닌 사람의 품격을 높였다. 또 다른 노리개는 도깨비와 같은 귀신을 내쫓아 부적의 의미를 부여했다. 이보다 특이한 건 귀를 청소하는 귀이개 달린 노리개. 은으로 만든 귀이개를 달아 귓속 청소에도 이용했다.

독 감별

과거 음식에 독을 넣어 정적을 죽이거나 여인끼리 시기와 질투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은으로 만든 장신구가 달려 있는 노리개가 자주 발견되기도 한다. 길고 가느다란 은제 도구는 음식을 묻혀 색이 변하는지 감별하는 용도로도 쓰였다. 은이 검은 색으로 변하는 순간 피바람이 불었다.

기품 지닌 장신구

여인의 기품을 살리는 노리개. 옥과 은처럼 귀한 보물을 달고 어여뿐 색실과 매듭으로 착용자의 품격을 살린 장신구 문화를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한복과 짝이 되는 노리개는 집안의 가보로 내려와 여인에게서 여인에게로 그 멋과 전통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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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장도(銀粧刀)
국립민속박물관 | CREATED BY MEDIA N 2023. 4.30.

절개의 상징

절개의 상징과 같은 은장도. 여인들이 지니던 물품으로 호신용으로 사용하던 장신구에 속했다. 대부분 자결 목적으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용도이기도 했다.

호신용 장신구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재료는 은이 쓰여 귀한 물품에 속한다. 현대에는 호신용 스프레이나 휴대전화로 긴급상황을 알리는 일이 있으나 과거에는 이런 기기가 없었다. 실제 크기와 칼날은 급소가 아니고서야 생명을 위협하는데 한계를 지닌다. 말 그대로 공격보다 최소한의 방어만이 가능해 휴대성이 좋지만 실용성은 낮다.

때로는 독 감별

상대를 위협하거나 자결하는 목적에서 실용성이 떨어지나 실상 여행 중이나 밖에서 노닐다보면 칼과 같은 도구의 필요성이 잦다. 은장도에는 은으로 만든 작은 젓가락이 함께 달려 있는 경우가 있다. 일각에서는 음식 속에 독이 있는지 알아낼 목적으로 부착했다고 한다.

휴대성 높은 장신구

몸에 항상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은장도는 일반 상식과 달리 여인뿐 아니라 남성도 가지고 다녔다. 칼집에 새겨진 문양과 그 재료의 귀중함은 당시 시대상을 알게 한다. 물론, 은뿐만 아니라 금, 옥, 나무, 동물의 뼈로도 만들었다. 이를 금장도, 옥장도, 목장도, 골장도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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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교(四人轎)
국립민속박물관 | CREATED BY MEDIA N 2023. 4.30.

럭셔리 슈퍼카 '가마'

가마는 선조들의 이동수단으로 지체 높은 이들이 출타할 때 이용했다. 지금은 집집마다 자동차가 한대씩은 있으나 가마는 신분 낮은 이들에게 금지의 대상이었다. 바퀴가 달려 이동하는 형태도 있지만 대부분 앞뒤에서 사람이 직접 들고 이동했기 때문에 가마꾼은 노동강도가 심했다. 사인교는 앞뒤 네 사람이 가마를 들고 이동한다하여 불리는 이름. 어찌보면 현대의 오프로드 4륜 구동 자동차, 혹은 럭셔리 슈퍼카에 비유할 수 있다.

가마로 나선 효행로

조선 정조임금이 사도세자의 무덤을 보러 어머니 헌경왕후와 함께 경기도 화성으로 행차할 때 사용한 가마는 말이 끌었다. 이동거리도 길고 왕족의 행차이기에 가마 앞뒤 큰 말을 묶어 흔들림을 줄였다. 정조대왕 능행차에 동행한 헌경왕후, 비록 가마로 이동했으나 긴 거리 여행이어서 피로를 느꼈을 것이다.

멀미 걱정 효자

오랜 여행을 하면 멀미가 심한데 선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자에 따르면 배멀미보다 더한 게 가마 멀미로 헌경왕후는 화성으로 행차하기 전 미리 가마에 올라 사전 연습을 했다고 전해진다. 효성 깊던 정조가 어머니의 여행 멀미까지도 걱정했다는 게 드러나는 기록. 실제 능행차 때에도 정조는 어머니 가마 뒤에 위치해 임금의 지위를 낮췄다. 그는 자주 가마로 이동해 어미니의 여행 불편 정도를 물었다고 전해진다.

효율성 낮은 이동수단

말이나 소와 같은 가축이 귀했던 시절, 가마는 사람의 힘으로 이동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외국과 달리 증기기관이나 바퀴가 달린 수레를 활용하지 않아 장기간의 여행이 힘들었고 사람의 이동을 제한했다. 어찌보면 문명의 교류를 막는 과학의 부재가 여실히 드러난 이동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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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 연(硯)
조선시대 | 국립중앙박물관

문방사우

필기도구가 마땅치 않았던 과거, 문방사우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지금처럼 전화가 없던 시절 서신으로 멀리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붓과 먹물은 필수. 먹을 가는 용도인 벼루는 돌이나 때로는 자기로도 제작됐다.

새겨진 문양

벼루에는 학이나 용 또는 매난국죽 등의 모양이 담겼다. 사용하는 주된 이들이 선비와 같은 지배계급이었던 만큼 그들이 동경하는 동식물로 문양을 새겼다. 사진 속 벼루는 특이하게도 꽃게를 상단과 왼편에 장식했다.

다양성

흔히 커다랗고 무거운 벼루를 떠올리지만 여행 중간 서신을 작성하려면 이동이 편한 크기의 작은 벼루도 필요했다. 아울러 돌로만 제작한 게 아니라 도자기, 옥이나 수정, 비취, 금과 은 등으로도 벼루를 만들어 사용했다.

묵지, 연지

물론 평평한 벼루도 있으나 대개의 벼루는 먹즙이 모이도록 묵지, 연지라는 홈을 냈다. 먹을 가는 벼루 연당 부분에서 이곳으로 먹물이 모였고 붓에 묻혀 글과 그림을 그렸다. 벼루는 무덤에서도 발견되는데 사후 세계를 믿는 이들의 사고관이 담겼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되는 부분으로 무덤의 주인이 평소 애용하던 물품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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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상감경대
고려시대 | 국립중앙박물관

거울과 공예

예로부터 선조는 나전경대, 주칠경대, 흑칠경대 등 다양한 형태의 경대를 사용했다. 금은 상감 경대는 막대에 금과 은으로 상감하고 상단 중앙 연꽃무늬 고리에 거울을 걸도록 제작됐다.

당초문과 능화문

덩굴 식물 무늬를 뜻하는 당초문은 공예품 겉면을 장식하는 주된 문양 가운데 하나. 경대는 은으로 식물 줄기를 상감해 모양을 냈다. 어두운 철제에 대비를 이루는 은빛은 경대를 고풍스럽게 한다.

모란꽃

부귀영화를 의미하는 모란은 선조들의 물품에서 자주 보인다. 경대는 꽃들의 왕으로 여기는 모란 무늬로 장식됐다. 새와 모란을 금과 은으로 기다란 철제에 모양 냄으로써 투박할 수 있는 막대를 아름답게 승화했다.

연꽃

거울을 걸도록 만든 걸이 부분은 연꽃 모양으로 제작됐다. 연꽃은 불교에서 귀하게 여겨지는 식물로 제작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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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 속 제도와 법률
아직도 몰상식과 불합리가 사회를 잠식한다.

모자란 인간이 만든 바벨탑

인간이 만든 제도와 법, 악법도 법이라 죽어간 철학자. 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그들의 일생을 좌우하는 제도와 법률...

참사만 있고 책임은 없다

특정 국가의 여전한 신분 제도와 보이지 않는 철벽, 14세기무렵 시작된 유럽의 종교재판, 그 혼란 속 마녀사냥으로 죽어간 숫자는 대략 20~50만명. 무의식으로 받아들인 제도와 법률이 초래한 참사.

지난 18, 19대 국회에 제출된 의안 숫자는 3만건

여전히 4대 성인을 양산중인 사회, 신을 닮았다는 인간은 아직도 불완전한 법률을 제정하고 해석중이다. 그것도 연간 만 번 가까이. 악법도 법이라 따르는 무의식의 존재, 인간. 이에 관한 두둔이 짧게는 그들의 하루, 더 나아가 일생을 좌우했다.

제도와 법률 뒤로 숨은 몰상식

누구나 공평하게 주어진 24시간과 한번의 인생. 당신은 불완전한 제도와 법률로 누군가에게 돌을 던졌다. 이를 인지하는 데 걸린 시간은 수백년. 그 와중에 철학자는 죽고 마녀는 화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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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
이집트 아비도스, 람세스 2세 신전, 기원전 약 1279-1213년 | 브루클린박물관

장수한 왕

고대 이집트 전성기를 이끌었던 람세스 2세는 장수했다고 알려졌다. 그는 90세까지 이집트를 통치했고 지금도 분쟁이 발생하는 팔레스타인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

석회암 재질

유물은 석회암과 안료를 사용해 파라오, 즉 람세스 2세를 묘사했다. 석회암은 내구성이 좋고 가공이 비교적 쉽기 때문에 조각 재료뿐 아니라 건축용 석재로 널리 쓰인다. 산호와 조개 등 다양한 생물체의 패각이 쌓여 형성된 석회암은 주로 따뜻한 기후, 또는 열대지방의 얕은 바다에서 굳어져 생긴다.

불멸의 파라오

파라오는 고대 이집트 왕국을 통치하는 왕을 지칭한다. 내세를 믿었던 이집트는 왕이 죽은 뒤에도 영혼이 남아 불멸한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통치기간 피라미드를 지어 사후에 지낼 공간을 만들었다. 인간이 아닌 신으로 추앙됐던 파라오는 피라미드 안에서 영원한 권력과 안식을 누렸다.

거대 피라미드

이집트 기자 지구에 가면 전체가 석회암으로 이뤄진 거대 피라미드가 발견된다. 벽돌형태로 가공하기 쉽기 때문에 건축물의 바닥이나 기둥으로 사용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석회암으로 이뤄진 유적이 발견되곤 한다. 대표적인 문화재가 원각사 10층 석탑. 현재도 고급 건축물의 내장재로 사용되며 예술적 가치를 지닌 조각상의 재료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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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티르데스의 관
이집트 테베, 기원전 8-7세기 | 브루클린박물관

공포스런 미라

고대 이집트 왕조는 사후 세계를 믿어 죽은 이를 미라로 만들었다. 흔히 붕대로 감긴 시체가 되살아 인간을 좇는 영화가 많은데 실제 시체를 아마천으로 싼 뒤 관에 넣었다. 미라로 된 시체는 공포스럽게도 내장이 모두 제거된 상태로 자신이 죽은 뒤 시체가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같은 작업을 했다.

사자의 서

미라와 함께 발견되곤 하는 유물이 있는데, 바로 사자의 서. 고대 이집트인은 죽은 뒤, 신 오시리스 앞에서 심판을 받고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다. 사후 세계의 안내서로 여겨지는 사자의 서는 망자가 기억해야 할 내용이 적혔다. 신이란 심판자 앞에 선 망자, 그들은 자신의 심장과 깃털을 무게로 재서 더 가벼워야 영생이라는 기쁨을 얻었다.

망자의 여행

머릿속의 뇌마저 제거 당하고 장기는 단지에 넣어 관과 함께 매장됐다. 발견된 미라의 관은 177.8센티미터, 미라는 154.9센티미터의 크기를 하고 있다. 당시 살았던 이들의 신장도 알 수 있는 유물. 관은 오시리스을 닮았고 관의 겉면에는 망자가 죽은 뒤 여행하는 사후 세계가 그림으로 펼쳐진다.

쇠퇴한 왕조의 유물

관의 주인으로 알려진 토티르데스는 이집트 제26왕조 시기에 살았던 인물로 추정된다. 기원전 664년부터 기원전 525년 사이에 이집트를 다스렸다고 알려진 왕조는 고대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르며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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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조선 정조 임금과 신하 정약용의 염원

유럽 성채가 부럽지 않은 문화재

정조와 정약용의 합작품으로 알려진 화성. 장안문과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이 둘러싼 화성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성채로 완벽에 가까운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친위대와 왕권강화

당초 성이 완성되기까지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으나 정약용은 과학기술을 적용해 3년도 걸리지 않는 시간에 성채를 완성한다. 성에는 정조의 친위대를 두어 왕권강화에 한몫을 담당한다.

화성행궁

화성에는 정조 임금을 포함해 역대 왕이 머무는 공간이 존재한다. 바로 행궁. 훗날 자신이 왕위에서 물러나면 머물 생각으로 그는 화성에 행궁을 지었다.

현명한 신하

거중기와 녹로 등 축성 장비를 고안해 사용했기에 공사 기간이 무려 삼분의 일로 줄었다. 당시 기록에는 정약용이 공사책임제를 도입하고 공사에 동원된 백성에게 적합한 보상을 제공했기에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정약용의 합리적 사고방식이 스며든 화성, 중세 유럽의 성과 비교해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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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
인류의 재앙, 종말을 예고했던 전염병 | 12지신 쥐

죽음의 사자

흑사병은 14세기 유럽에서 창궐한 전염병. 유럽 인구의 절반 가까이 죽였다는 공포의 질병은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발병하면서 유럽 전역에 커다란 해를 끼친다.

쥐와 벼룩과 박테리아

병의 원인은 페스트균으로 밝혀졌고, 이는 쥐를 통해 퍼졌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흑사병의 원인을 알지 못했던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검정 피부

일단, 병에 걸리면 이름답게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상을 보였다. 훗날 박테리아에 감염된 쥐의 혈액을 벼룩이 먹고 그 벼룩이 인간을 물면 감염된다고 밝혀졌다. 위생 관념이 부족했던 당시 인류는 전염병으로 잔혹하게 죽음에 이르렀다.

동물과 인간의 동시 감염

동물과 인간이 동시에 감염되는 흑사병은 국가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거나 무역과 같은 교류가 있을 때 전파되곤 했다. 특히 쥐는 인간 주변에 서식하는 동물로 전염병의 전파 속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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